포르쉐의 역사
1.내가 꿈꾸던 자동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했다.
포르쉐의 역사를 살펴보면 스포츠카의 대명사 같은 브랜드이며, 놀랍게도 독일 브랜드에 더 놀랍게도 폭스바겐 산하의 자동차 브랜드 포르쉐. 더더욱이 놀라운건 폭스바겐과 포르쉐는 같은 집안 브랜드라는 것. 자동차계에 길이 남을 천재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와 그의 아들 페리 포르셰가 1931년 설립 후 1948년 폭스바겐 비틀 기반의 스포츠카이자 포르쉐의 첫 번째 자동차인 포르쉐 356을 만들면서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창립자 포르셰는 전범으로 체포된 뒤 병을 얻어 1951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가 경영 전반에 뛰어들면서 포르쉐는 급변하게 됩니다.
1963년 역사와 전통의 911이 탄생했고, 이후 탄탄대로를 걸을줄 알았건만 한동안 포르쉐는 911 말고는 성공한 모델을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중간에 폭스바겐이 경영에 개입해 회사가 망할뻔 했지만 간신히 구사일생하고 1990년 부도 직전까지 몰리게 되는데 여기서 또하나의 명작이 탄생합니다. 바로 박스터. 911의 반값이면 구입할 수 있었던 박스터는 대히트를 기록했고 포르쉐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포르쉐 최초의 SUV 카이엔을 내놓으면서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지금과는 달리 폭스바겐을 인수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오늘날까지 과거 포르쉐를 구했던 박스터와 카이엔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 포르쉐를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2. 포르쉐도 피해가지 못한 전범 기업 이미지
2차대전 당시 전쟁물자 생산을 거부할 수 있는 독일 기업이 없었고,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는 아돌프 히틀러와도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지므로 포르쉐 역시 2차대전의 전범기업으로서의 흑역사가 존재합니다. 폭스바겐 비틀의 경우가 히틀러와 포르셰 박사가 합작하여 탄생한 모델이기도 때문입니다. 더불어 전쟁을 거치면서 쌓인 데이터와 기술력이 그대로 자동차에 반영되었을 것이고, 기술적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봄으로써 후발 주자 자동차 브랜드와는 비교도 안되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것이죠. 옆나라 전범기업들이 자동차, 항공기, 선박, 전자, 통신 등 산업에서의 공학기술이 전쟁을 통해 발전이 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이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했으니 외계인 고문썰이 괜히 나온게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급박한 전쟁상황 때문에 문제해결에 효율성, 효과성, 비용절감 등과 같은 원리에 의한 공학적 산출물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공학기술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메르세데스-벤츠와 같은 전범 이후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3. 외계인을 고문해 개발했다는 포르쉐의 기술력
세계에서 유일하게 슈퍼카를 기계생산으로 양산하는 업체이며, 또한 순수익을 따졌을 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는 자동차 회사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구리 디자인은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911 디자이너들은 죄다 똑같이 개구리같은 스포츠카만 하루 종일 그리다가 퇴근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르쉐는 스포츠카 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해 일상생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포츠카라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센터콘솔에서 몇 가지만 조작하면 바로 트랙에 뛰어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세팅이 잘 되어 스포츠카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았고, 실제로 시트에 앉으면 착좌감부터가 어지간한 준대형차 급 포지션이 나오며 승차감 또한 나날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평입니다. 그러다가 트랙위에 오르면 강렬한 스포츠카가 되어버리니 매니아층이 형성될 수 밖에 없는 자동차임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쉐의 기술력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일상적인 용도와 스포츠 드라이빙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고, 연비도 준수한 편에 방지턱과 같은 일상 도로의 최적화, 차량의 내구성 모두를 갖추었기에 지금의 포르쉐가 완성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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